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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폭 문제, 가해자 폭로로 끝나서는 안 된다

2021.03.16

 

고등학생 딸과 함께 ‘가십걸’이란 미국 드라마를 본 적 있다. 뉴욕 맨해튼 최상류층 자녀들 모습을 그린 드라마다. 가십걸이란 익명의 블로거가 학생들 제보를 받아서 사이트에 자극적인 내용을 올리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누가 누구와 사귀는지’ ‘누가 누구랑 잤는지’ ‘성병이 있다는 소문’까지 감추고 싶은 비밀이 폭로된다. 이를 지켜보는 재미와 통쾌함이 버무려져 관음증을 자극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마냥 재밌게 볼 수는 없었다. 학부모이자 변호사 입장에서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잘못된 일이 드러나 교훈을 얻고 반성하여 과거 행동을 교정하면 다행이지만, 과거 사생활이 낱낱이 폭로되어 다시는 일상으로 복귀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한다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근 과거 학교 폭력 피해 사실이 폭로되고 가해자로 드러난 이들이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난받는 것을 보면서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도 상처가 아물지 않는 피해자의 심정을 생각하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렇게 할까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이를 만천하에 공개해 지난날 가해자의 인생이 망가진다고 해서 피해자의 상처가 진정 치유될 수 있을까. 피해자의 큰 상처를 이해하더라도 오래된 옛 사건을 폭로하는 것은 한때 가해자였던 사람의 명예나 사생활 침해 정도가 지나치게 커 상처를 주고받는 셈이 되고 만다.

개인의 명예나 사생활이 어디까지 보호되어야 하는 것인지는 법적으로도 어려운 주제다. 최근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이를 형사처벌하도록 규정한 형법 제307조는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결정이다. 즉 공표된 사실이 객관적 진실에 부합하더라도 개인이 숨기고 싶은 병력, 성적 지향, 가정사 등 사생활인 경우 이를 공표하는 것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되고 사람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평가인 ‘외부적 명예’를 훼손할 수 있으므로, 그 명예가 일부 과장되거나 잘못된 세평에 의한 것이더라도 이를 바로잡기 위해 사실을 적시하는 것은 위법하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 결정은 아쉬운 측면이 있다. 민주국가에서 진실을 말하는 데 제한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입각할 때 보호할 필요가 없는 ‘잘못된 외부적 명예’ ‘허위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입을 막는 것은 잘못 아닌가. 최근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아빠들의 신상을 공개한 ‘배드파더스’ 사건에서 법원이 사실 적시 명예훼손에 대하여 위법성 조각 사유를 넓게 본 판례를 볼 때 헌법재판소 결정은 다소 실망스러운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헌법재판소는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한 ‘디지털 교도소’ 사건처럼 ‘사적 제재’로 누군가를 매장하는 방법을 국가가 용인해선 안 된다는 점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과장된 정보가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면 그 개인은 회복 불가능한 사태로 치닫게 되고 사회에서 매장된다. 알 권리를 넘어 다수의 폭력으로 변질된다. 당사자가 극단적 선택이라도 한다면 이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인지 우리가 반성해야 할 지점이 있다.

’학폭' 같은 과거 일에 대해 잇달아 폭로가 이어지는 것은 새로운 기준과 질서를 세우기 위해 치러야 할 진통이라고 여긴다. ‘배드파더스’ 운영자가 1심에서 공익성을 인정받아 무죄를 받은 까닭은 양육비 문제의 심각성을 이슈화하고 입법 개선을 위해 노력한 점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문제 제기가 사적인 보복이나 가해자 비난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피해자가 공개 폭로를 결심하기 전에 가해자와 화해하는 공간, 치유하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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